외손자(외손녀) 와는 가족이 아니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외손자와 가족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2년여 간 외손녀를 기르면서 친척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아기가 귀엽다고 한사코  마다해도 돈들을 주셨습니다. 그건 우리네 정서 인 것 같습니다


그 돈으로 장난감이나 옷 을 사주려다가 통장을 만들어주려고  은행엘 갔습니다.


은행원 하는 말이  아무나 통장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게 아니고 아기와 나와의 가족관계를 증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족관계증명서는 구청에 가면 뗄 수 있다고 친절하게 일러줬습니다.  


외손녀의 어미인 내 딸과는 관계증명이 되겠지만 외손녀와 나와는 어떤 방법으로 관계를 증명 할 수 있을까?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 호적법으로는 딸은 결혼하면 친가의 호적에서 재적이 되기 때문에  이런 관계는 증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은 호주제도 도 없어지고  딸만 낳아 기르는 세대도 많아져서 외손녀와 가족관계증명을 할수 있기를 기대 했습니다. 


그러나창구에서 들은 대답은 외손녀와는 가족관계증명을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마음은 매우 씁쓰름했습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들 말합니다. 남녀평등이라고. 그건 말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호적법은 아직도 아들의 자식과는 가족관계지만 딸의 자식과는 가족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거와 똑같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실망을 안겨드리고 태어난 나의 부모님의 첫 자식 이지만 “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고모님 들 뿐인 집안의 늦둥이 외동아들로 태어나서. 나의 동생도 낳지 않으신 상황에서 내가 세살쯤에  전사하셨습니다.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아직도, 절망 속에서 살다 가신 할아버지께 죄송스럽습니다.


아들을 선호하고 아들로서만 대를 잇던 유교적 관습은 나를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들었고 당연하게도 나를 너무도 부당하게 대우했습니다. 


나는 사회적 관습의 피해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관습이란 내가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큰 장벽이었고 대항할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빙산 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잘하면 잘하는 대로, '딸'이 잘하면 뭐하느냔 식으로 한숨을 쉬셨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한숨을 쉬셨습니다. 


할아버지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자란 나는 내 탓이 아닌데도  죄책감과 더불어 소극적이며 외롭게, 허무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고, 할아버지께 내가 기쁨이 되지 못한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아들을 잃고 홧병을 얻으셨으면서도 너 댓살은 되었을 나를 업고"자장자장 우리아기, 조선 없는 우리 아기" 라고 자장가를 부르셨습니다. 


또한 할아버지께서는 다섯 살 된 내게 천자문 을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살아가면서 힘든 일에 직면 했을 때 절망 속에서도 사랑해주신 두 분의 사랑, 특히 귓가에 쟁쟁한 할머니의 자장가는 내 인생에 큰 버팀목이었고 꽁꽁 언 내 가슴을 녹이는 훈훈한 화롯불 이었습니다.

 

결혼해서 연년생으로  딸 둘을 두었습다. 둘째딸이 열 살이 되었을 때  난 용감하게도 셋째를 낳았습니다.


그때 사회적 배경은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던 시대에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셋째를 가졌다고 할 때, 주변의 시선은 그야말로 야만인이나 이방인으로 보았습니다. 


손위 시누이조차도 낳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부담감을 안고 태어난 아이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또 딸이었습니다.

 

위의 두 딸들은  교육자로써 제몫을 톡톡히 하며 잘 살고 있고, 마흔을 바라보며 낳은 늦둥이, 셋째는 서울대학에 입학해 졸업반입니다. 


늦둥이 막내는  나와 젊은 세대를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 이고   내가 조금이라도 젊게 살 수 있는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겨우 이십여 년이 지났건만 우리나라의 사회적, 국가적 배경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습니다. 


셋째를 낳으려던 임산부를 야만인처럼 보게 만들었던 국가적 정책은 급선회 하여, 다산하는 산모를 애국자라고 까지 칭하며 매스컴 들은 호들갑을 떱니다. 


그렇지만 외손녀 하나를 둔 큰딸은 딸 하나로 족하다고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합니다. 


내가 태어났던 시대와 겨우 60 여년 인데, 너무도 달라진 의식의 변화입니다. 


하지만 의식만큼 사회적 법체계는 따르질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빙산이던 관습도 새 시대 의 난기류를 만나 녹아내리고 나아닌 주변에서도 딸만 기르는 세대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말들을 합니다. “딸이 더 좋다, 


아들 둘이면 목메달, 딸 둘이면 은메달” 이라고.  그러면 뭐합니까? 


우리나라 현행 가족법은 아들의가족(친손자 나 친손녀) 와는 가족 관계증명이 되지만 딸의 자식(외손녀나 외손자) 과는 가족 관계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풍자이긴 하지만 많이 달라진 의식들이고 정책들입니다. 


자식을 기르는데 더 좋고 덜 좋은 게 있을까요?  딸들은 딸들대로, 아들들은 아들대로 자기 몫 제대로 하게끔 기르는 게 부모들의 의무이자 책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 딸들은 나의 한숨이 아니고, 나의 입가의 미소이며 나의 영원한 희망이며, 무한한 소망입니다.  


그녀들의 자식들 또한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며 나의 희망 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행 법으로는 단돈 천원짜리의 통장도 외 할머니나 외할아버지가 외손 자에게 만들어 줄수 없는게 현실입니다.


내가 자랄 때와는 많이 달라진 사회적 배경이지만, 나는 외손자들과 가족관계증명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60 이 넘은 내생에 외손들과 가족법상 떳떳한 가족관계를 증명하면서 살날을 기대해 봅니다.

                                                      조 태란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목록
독자광장 > 독자투고
독자광장 > 독자투고
공지 독자투고는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제시와 기사제보를 위해 마련된 곳.. 편집부 2011.06.11
이전 글쓰기새로고침